
‘세계 최초’의 타이틀은 기술로서 승부를 거는 회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얻고 싶은 명예다. 더욱이 세계 1, 2위 자리를 다투는 곳이라면 세계 최초를 향한 집착은 더욱 강해진다. 세계 1위의 CPU 제조사인 인텔과 2위인 AMD라면 말 할 나위 없다. AMD가 애슬론 1GHz를 인텔보다 먼저 내놓으며 기술, 속도의 선전포고를 한 이래 두 회사는 여러 가지 세계 최초 타이틀을 걸고 싸움을 벌여왔다. 두 회사가 벌이는 선의(?)의 경쟁덕분에 사용자들은 더욱 싼 값에 성능 좋은 CPU를 쓸 수 있으니 기분은 좋다.
세계 최초의 듀얼 코어 x86 CPU 대결에서 간발의 차이로 AMD를 찍어 누른 인텔은 최초의 듀얼 코어 CPU인 펜티엄 D의 뒤를 이은 새로운 아키텍처 프로세서, ‘코어2 듀오’를 내놓고 CPU 시장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코어2 듀오의 출시는 PC 사용자들에게 ‘성능 좋고 열도 적게 나는 꿈의 CPU’라는 놀라움과 희망을 안겨줬지만 인텔의 움직임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코어2 듀오 출시와 함께 4개의 코어를 CPU 기판에 넣은 ‘쿼드 코어’ CPU가 곧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문이 그 움직임의 정체였다. 코어2 듀오가 선보인 지 3달. 인텔이 만든 세계 최초의 쿼드 코어 CPU, 코드명 ‘켄츠필드(Kentsfield)’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한 지붕 두 가족 CPU, 듀얼 다이
2000년 11월에 첫 선을 보인 펜티엄 4의 기본 기술, 넷버스트(Netburst) 아키텍처는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명령의 개수(Instructions Per Cycle, IPC)를 줄인 대신 작동 속도를 크게 높여 PC 성능을 끌어 올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넷버스트 아키텍처를 쓰면 10GHz짜리 CPU도 만들 수 있다고 자랑하던 인텔의 이런 생각은 노스우드 코어 펜티엄 4까지는 별 탈 없이 흘러갔다.
하지만 프레스콧 코어 펜티엄 4가 첫 선을 보이면서 상황은 꼬이기 시작했다. 더욱 발전한 90nm 공정을 받아들여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코어 안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 개수가 노스우드 코어의 두 배를 뛰어 넘는 프레스콧 코어 프로세서는 그 기대를 멋지게(?) 저버렸다. 작동 속도를 높이려 실제 성능이 떨어지는 위험을 무릅쓰며 파이프라인을 30단계로 늘렸지만 전력 소비량과 발열이 너무 커 결국 4GHz의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 앉았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작동 속도를 높이지 못하는 펜티엄 4를 향해 ‘프레스핫’ 이라는 불명예를 안겼고 경쟁사인 AMD의 애슬론 64에 더욱 많은 관심을 보였다.
프레스콧 코어 개발 당시부터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을 예감한 인텔은 모바일 프로세서인 펜티엄 M의 기술(일명 배니어스 아키텍처)을 바탕으로 한 데스크탑 PC용 CPU 개발에 나섰다. 당시 인텔은 한 두 개의 넷버스트 아키텍처 CPU를 더 선보인 뒤 새로운 아키텍처를 쓴 CPU를 내놓을 생각이었지만, 프레스콧 코어 CPU를 향한 여론이 더할 나위 없이 나빠지자 급히 극약처방(?)을 내놓게 된다. 그것이 차세대 펜티엄 4 개발 계획인 ‘테자스(Tejas)’의 포기와 프레스콧 코어를 바탕으로 한 듀얼 코어 CPU 개발이다.
세계 최초의 x86 듀얼 코어 프로세서인 펜티엄 D는 프레스콧 코어 펜티엄 4 다이 두 개를 하나의 CPU 기판에 올렸다.
그 어떤 낌새 없이 등장한 인텔 최초의 듀얼 코어 CPU, 코드명 ‘스미스필드(Smithfield)’는 개발 계획이 알려진 지 반년이 지나지 않은 2005년 5월에 소비자에게 첫 선을 보였다. 인텔이 예정에 없던 넷버스트 아키텍처 듀얼 코어 CPU를 급히 선 보인 이유는 같은 달 AMD가 선보인 듀얼 코어 CPU인 ‘애슬론 64 X2’보다 먼저 제품을 내놓아 유리한 고지에 오르겠다는 계산이 컸다. ‘펜티엄 D’ 브랜드가 붙은 스미스필드 코어 CPU는 인텔의 생각대로 ‘세계 최초의 x86 듀얼 코어 CPU’의 이름을 얻었고, 지금도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위 이미지는 싱글 다이와 듀얼 다이의 모습을 비교한 것이다. 펜티엄 4를 비롯해 코어2 듀오를 비롯한 싱글 다이 CPU는 방열판(히트스프레더)를 떼내면 단 하나의 세라믹 코어가 보인다. 이와 달리 펜티엄 D와 켄츠필드가 쓰는 듀얼 다이는 세라믹 코어가 두 개 놓여 있다.
그렇지만 펜티엄 D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갑작스레 만들어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듀얼 코어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AMD가 내놓은 애슬론 64 X2가 하나의 반도체 칩(다이, Die) 안에 두 개의 코어를 함께 넣은 구조를 썼다면 펜티엄 D는 두 개의 프레스콧 코어 펜티엄 4 다이를 기판 위에 올린 ‘듀얼 다이’ CPU였다. CPU 위의 방열판(히트 스프레더)을 떼 내면 두 개의 코어 칩이 보이는 듀얼 다이 CPU는 종전의 싱글 코어 CPU 설계를 대부분 그대로 쓸 수 있어 개발이 쉽다.
대신 CPU 칩 두 개를 기판 하나에 올린 셈이 되어 전력 소비량과 발열이 커지고, 두 CPU가 하나의 시스템 버스를 사이에 두고 데이터를 주고 받아 효율성이 떨어지는 약점이 있다. 이 약점은 인텔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빨라야 6개월~1년이 걸리는 ‘전혀 다른 듀얼 코어 CPU’ 개발을 기다릴 수 없었기에 이런 변칙 CPU를 선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인텔은 이후 65nm 공정을 받아들여 발열을 줄인 ‘프레슬러’ 코어 펜티엄 D를 내놓고 공격적인 가격 정책을 선보여 소비자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지만 출시 당시만 해도 그리 박수를 받을만한 기술을 선보인 것은 아니었다.
| 싱글 다이 | 듀얼 다이 |
CPU 개발 | 복잡하다 | 쉽다 |
코어간 데이터 교환 | 전용 데이터 버스 | 일반 시스템 버스 |
2/3차 캐시
메모리 공유 | 가능 | 불가능 |
전력소비량/발열량 | 적음 | 싱글 코어의 2배 |
(표 1) 싱글 다이와 듀얼 다이의 차이
듀얼 코어 * 듀얼 다이= 쿼드 코어? 돌아온 듀얼 다이 기술
1년 넘게 듀얼 다이 CPU인 펜티엄 D로 힘든 싸움을 벌인 인텔이 제대로 된 최초의 반격은 2006년 8월에 내놓은 코어2 듀오(코드명 콘로, Conroe)다. 펜티엄 M 프로세서의 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새로운 프로세서 기술 ‘코어(Core) 아키텍처’를 쓴 최초의 데스크탑 PC용 CPU인 코어2 듀오는, 작동 속도는 펜티엄 D보다 1GHz 이상 낮지만 체감 속도는 훨씬 뛰어나 소비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코어2 듀오는 펜티엄 D와 달리 싱글 다이-듀얼 코어 기술을 바탕으로 두 코어가 2차 캐시 메모리를 공유하는 기술까지 더해 성능을 더욱 끌어 올렸다.
단순히 빠른 CPU를 뛰어 넘어 전력 소비량과 발열 문제를 잡아 ‘듀얼 코어 CPU는 시끄럽다’는 편견까지 날려버린 코어2 듀오는 CPU 시장에서 인텔의 주도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CPU 코어를 하나의 다이 안에 합친 것은 물론이고 AMD 애슬론 64 X2도 하지 못한 2차 캐시 메모리의 공유까지 해내 기술 분야에서도 AMD를 다시 앞질렀다는 호평을 받았다. 종전 인텔 CPU에 비판의 눈길을 보냈던 사람들까지 속칭 ‘인텔빠’로 만들 정도로 코어2 듀오의 파괴력(?)은 컸다.
진정한 듀얼 코어 프로세서의 길을 보여준 코어2 듀오는 기술, 성능, 전력 소비량 등 소비자가 반길만한 여러 매력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코어2 듀오의 핵심인 코어 아키텍처는 데스크탑 PC를 뛰어 넘어 노트북 PC(코드명 메롬), 서버(코드명 우드크레스트) 시장에서도 정통 듀얼 코어의 힘을 떨치고 있다.
하지만 코어2 듀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3달이 지나지 않은 지금 쿼드 코어 기술을 자랑하는 켄츠필드가 이 세상에 선보이려 한다. 아무리 인텔이 많은 돈과 개발진을 쏟아 부어 CPU를 만든다 해도 듀얼 코어에서 쿼드 코어를 갑자기 만들어 내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 이라고 해도 좋을 일이다.
어찌 보면 불가사의한 켄츠필드의 빠른 출시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켄츠필드는 펜티엄 D가 그랬듯이 CPU 기판 위에 두 개의 다이를 올린 ‘듀얼 다이’ 프로세서다. 최초의 펜티엄 D CPU인 스미스필드가 그랬듯이 너무나 빨리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켄츠필드는 사실 콘로 코어 CPU 두 개를 하나의 기판 위에 합친 셈이다.
왜 인텔은 제대로 된 듀얼 코어 제조 기술을 손에 넣었음에도 오래된(?) 듀얼 다이 프로세서를 다시 내놓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한데 싱글 다이 쿼드 코어 CPU를 만드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 그림은 펜티엄 III, 펜티엄 M, 애슬론 XP의 다이 크기를 비교한 것이다. CPU 기판에 비해 다이는 훨씬 작고, 크기 또한 비슷함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다이 크기는 배선 크기, 발열 및 전력 소비량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크기가 마구 커질 수 없다. 보통 다이 크기는 어른의 손톱만한 크기를 넘지 않는다. 이 안에 4개의 코어를 집어 넣기란 현재 기술로서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CPU를 만들어내는 공정 기술이 지금보다 한 단계 발전한 45nm 수준이 되어야 하고 1~2년의 시간을 들여 꾸준히 연구를 해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인텔조차 최초의 싱글 다이 쿼드 코어 CPU인 코드명 ‘블룸필드(Bloomfield)’를 2009년에나 발표한다는 계획을 세울 정도로 싱글 다이 쿼드 코어 개발은 이제 막 걸음을 뗐을 뿐이다. 서버 시장에서도 지금의 우드크레스트 코어를 대신할 코드명 ‘클로버타운(Clovertown)’과 ‘해퍼타운(Hapertown)’ 역시 듀얼 또는 멀티 다이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싱글 다이 쿼드 코어를 빠른 시간 안에 선보이지 못하는 것은 경쟁사인 AMD도 마찬가지다. 일명 ‘K8L’ 아키텍처를 쓴 서버용 싱글 다이 쿼드 코어 CPU, 코드명 ‘바르셀로나(Barcelona)’가 빠르면 2007년 하반기에 선보일 계획이지만 데스크탑 PC 시장용 제품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며, 그 전까지는 메인보드 하나에 듀얼 코어 CPU 두 개를 꽂아 쿼드 코어 효과를 낸다는 사실상의 보급형 듀얼 CPU 솔루션인 ‘4×4’로서 쿼드 코어의 희망을 살려야 할 처지다. 인텔과 AMD 모두 소비자가 쉽게 살 수 있는 싱글 다이 쿼드 코어 CPU에 대한 똑 부러진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코어2 듀오 CPU 두 개를 하나의 기판 위에 올렸을 뿐’이라고 해도 그리 문제되지 않을 켄츠필드는 그저 기술을 자랑하고픈 인텔의 과시욕이 만들어낸 괴물일까? 반드시 그렇게 봐야 할 문제는 아니다. 시간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전문 멀티미디어 편집, 디자인, 설계, 수학 연산 등 워크스테이션급 PC는 CPU 코어 개수가 늘어날수록 효과가 커진다. 정해진 공간에 더 많은 코어를 집어 넣어 성능을 높여야 하는 서버 또한 CPU를 만든 방법이야 어떻든 코어 개수가 많다면 환영한다. 켄츠필드가 노리는 시장이 바로 이런 전문가, 서버 시장이다.
- 2부에 계속 -